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제나라 15. 멸망


15. 고구려 유민의 왕국 낙양 장악… 부하 배신으로 몰락

이납은 사고·사도·사현·사지의 네 아들을 뒀다.
792년 이납이 세상을 뜨자 왕의 지위는 아들 이사고에게 세습됐다.
당 황제는 이정기·이납 부자의 두려움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당은 이납 때와 달리 이사고의 왕위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사고는 제나라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역시 이정기와 이납처럼 황제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것 같다.
이에 관해 역사책 신당서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덕종 황제가 승하했을 때의 일이다. 이사고는 조문 사절을 보내지도 않고 국상을 치르는 것도 거부했다.
그는 어수선한 틈을 타 당을 공격, 양주를 점령하려 했다.
이를 알게 된 강성 절도사 이원소가 이사고를 (문상에) 초대하자,
이사고는 수하의 장군들을 불러모아 ‘원소가 흉계를 꾸며 나를 유인하려 한다’고 성토한 뒤, 군사를 일으켜 치려 했다.
그러자 새 황제 순종이 이사고를 말렸다.”

조정은 이사고를 달래기 위해 ‘검교사도’란 관직을 내리고 ‘시중’에 봉했다.
그런 이사고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악성종양으로 고생하다 806년에 세상을 떴다.
그가 언제 태어나서 몇살에 죽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정은 그가 죽은 뒤 ‘태부’의 지위를 추증했다. 태부는 삼공에 해당하는 최고위직이었다.
하지만 제나라 임금 이사고가 태부라는 당의 벼슬을 우습게 여겼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사고가 세상을 뜨자, 왕위는 이복동생 이사도에게 이어진다.
이사도는 이사고의 죽음을 조정에 알리지도 않은 채, 독자적으로 취임식을 갖고 제나라의 3대 왕으로 등극한다.

물자 보관소 ‘하음’ 불태워

이사도는 적극적인 성품을 지녔던 듯하다.
선대의 유업을 이루고자 결심한 그는 일종의 게릴라 부대를 조직, 815년 낙양을 공습했다.

이사도는 낙양의 물자 보관소인 ‘하음’을 공략했다.
당시 하음에 있던 창고의 수는 무려 150만개. 저장돼 있던 군량미만 400만가마에 달했던 것으로 전한다.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는 하음의 곡식창고를 모조리 부순 뒤 불태워버리고, 회하와 낙양을 잇는 다리인 건능교를 파괴시켰다.

게릴라전에 능했던 이사도는 낙양 시내 곳곳에 사저를 짓고는 아예 군 부대를 상주시키고, 병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었다.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에게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해버린 것이었다.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는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조정은 낙양 유수 여원응에게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를 제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여원응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의 제나라 기지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황제의 부대는 고구려인의 피를 가진 제나라 병사들의 용맹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나라 병사들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공격을 하지 못하다,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사도의 게릴라전은 이후 4년 간 수시로 펼쳐졌다.
황제 헌종은 행정수도 낙양에 발을 딛지 못했다.
기록은 “황제가 (다급한 나머지) 신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다.
강한 것은 부러지는 법일까? 황제보다 강했던 ‘제왕’ 이사도의 목숨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원인은 도지병마사 유오였다.
도지병마사란 제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
유오가 반란을 꾸민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사도는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수도 운주로 불러들였다.

유오는 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보여드릴 것이 있다”며 접근, 이사도와 그의 아들을 살해한 뒤 목을 잘라 당 조정에 보냈다.
황제는 뛸 듯이 기뻐했다. 당서의 기록은 “조정이 3일 밤낮으로 잔치를 벌였다”고 전하고 있다.

제나라의 멸망했다.

제나라 14. 중국 역사서도 왕으로 기록


14. 중국 역사책도 ‘왕’으로 기록


이납은 황제의 제안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 이정기의 지위를 잇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그였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당이 먼저 이납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납은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당 조정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당서는 이에 대해 ‘이납이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시각인 듯하다.
앞뒤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두 세력 간에 타협이 이뤄진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784년 황제는 이납에게 검교공부상서·운주 자사·평로절도사·치청관찰사·검교우복사·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의 관직과 함께
‘왕권’을 의미하는 ‘철권’을 전하고 ‘농서군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철권이란 살인에 대한 면책권을 뜻하는 말로, 직할 영토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일체의 사법권을 이납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당과 제의 관계가 군사적 목적으로 얽힌 협력관계였다는 사실을 뜻한다.
다시 말해 두 나라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일종의 ‘독립국 연합’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제나라의 주력부대는 한민족의 피를 지닌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중국 역사책 당서도 이를 인정 “(제가 산동을 점령했던 55년 간) 언어와 풍속에 심한 변화가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통치를 하다 보니, 백성들의 풍습이 포악해지고 인심이 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쓴 주관적 기술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우리에게
  제나라에서 고구려의 언어가 쓰였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민족의 풍습이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제나라 임금’ 이납은 34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때는 792년. 사망원인은 그의 아버지 이정기와 같은 악성 종양이었다.
당 조정은 3일 간 정사를 폐지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까닭은 이납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왕으로서 이납의 권위는 확고했던 것 같다.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도 이납의 죽음을 ‘졸’이라 하지 않고 임금의 죽음을 일컫는 ‘훙’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도 마찬가지로 이납의 죽음을 ‘훙’이라 적으며 그의 죽음에 예를 표했다.

제나라 13. 당 나라와 정면 승부


13. 국가 건설해 당 황제와 정면승부


이제 이납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사항전을 결심한 그는 후방 운주로 진지를 옮기고 군사력을 보강했다.
운주는 이납의 아버지 이정기가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주둔했던 전략적 요지였다.

이납은 세력 보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결과가 전열과 이희열·주도·왕무준 등과 연합해 결성한 제2차 동맹군이었다.
대 제국 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군사력과 함께 거기에 걸맞은 형식을 갖춰야 했다.
제2차 동맹군은 독립국가를 수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때는 782년 11월이었다.
이납은 운주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 국호를 ‘제’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동맹군은 ‘새 나라가 생겼으며, 이납이 그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하늘에 알리는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이납은 스스로를 칭할 때 ‘과인’이라 말했다.
제나라는 각 지방행정 단위를 주로 나누고, 각 주의 행정책임자로 자사를 뒀다.
문무관료인 백관을 임명해 나라의 틀을 잡았고, 운주를 수도로 정했다.
수도의 이름은 ‘동쪽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동평부’로 바꿨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운주는 오늘날의 ‘동평’. 지금의 지명은 당시 제의 수도였던 동평부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정비가 끝나자 이납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새 나라’의 군대는 강했다. 파죽지세로 치달은 이납의 군사는 운하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던 변주를 장악했고,
이어 서주의 서쪽에 위치한 송주를 함락시켜 당나라 조정을 압박했다.
다급해진 황제 덕종은 서쪽 토번(티베트)을 지키던 군사력을 동쪽으로 돌리고, 남방의 수비를 담당하던 영남의 부대를 끌어올렸다.
시급한 것은 서쪽과 남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동쪽 제나라의 침공을 막는 일이었다.

제나라의 위세가 천하를 흔들자 이번에는 당 조정에서 이탈자들이 나왔다.
‘우승 대신’으로 있던 고관이 이납에게 군량미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조정이 흔들리자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맹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황제 덕종은 살아남기 위해, 783년 10월 봉천으로 도망을 가 버린다.

이번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은 황제측이었다.
그해 12월 덕종 황제는 봉천에서 사자를 보내 동맹군측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이 때 황제측에서 내건 조건은
  반란을 없었던 일로 치고
  관련자 모두를 사면하며
  이납·전열·왕무준·이희열 4인을 국가의 공신인 ‘훈구’로 대우하겠다는 것이었다(태평어람 권113).
‘성신문무’라 불리는 대타협 조치였다.

2016년 1월 17일 일요일

제나라 12. 복양 전투


12. 복양 공략하다 정부군에 포위돼


오랜만에 승기를 되찾은 이납은 군대를 북으로 돌려, 북방전선의 요지 ‘복양’ 탈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스물네 살의 이납은 아직 미숙했다. 또 다시 마음만 앞서는 성급함을 보였다.
침착하지 못한 이납은 직접 군사를 재촉하며 서두르다 절도사 유흡의 부대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병사들은 하나둘씩 배고픔으로 죽어갔다. 이납은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죽어가는 동지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는 판관 방설을 황제에게 보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항복 의사를 전한 것은 782년 2월. 이정기 부자의 원대한 꿈이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엉뚱한 인물의 개입으로 상황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당시의 전쟁에는 환관이 참여하고 있었다.
환관의 역할은 황제를 대신해 작전권을 행사하고 장수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납과의 싸움에서도 중사란 직함의 환관 송봉조가 개입하고 있었다.
이납의 투항 요청을 받은 송봉조는 승리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납에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사옵니다. 이납의 군사를 모조리 격파하고 이납을 주살하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송봉조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납의 세력을 과소평가 하고 있었다.
황제 덕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납의 투항 사절 방설을 옥에 가둬버렸다.
송봉조는 꿈에 부풀었다. 장수들을 불러모아 이납을 죽일 계책을 짜내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정부군도 이납의 목을 당장 따올 수는 없었다.
수뇌부가 우왕좌왕하며 묘책을 궁리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 틈을 타 이납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 버렸다.

제나라 11. 낙양 보급로 끊다


11. 낙양 물자 보급로 끊어 국고 고갈

작전의 기본 틀은 이정기와 같았다.
낙양으로 향하는 수로를 차단, 물자의 보급을 끊어 조정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병력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납과 전열은 군사를 이끌고 강회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물길의 요지 와구로 진격했다.
양숭의는 이유악과 함께 섬서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한수의 요충지, 양과 등으로 쳐들어갔다.
와구는 이정기가 낙양 공략을 시도했을 때 정부군이 군사를 배치했던 물길의 길목이었다.

엉성한 정부군은 전열을 정비한 쿠데타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와구와 양·등은 순식간에 점령됐다.
조정은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남쪽에서 생산된 물자는 당의 수도로 공급되지 못했고, 장안과 낙양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장안은 물자의 자체조달이 불가능한 도시였다. 수도의 백성들은 물품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조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황제는 망연자실해 했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동맹군의 세력을 꺾을 방도가 없었다.
“대책이 없겠는가?” 황제는 백관을 소집해 방책을 구했다.
제국의 수도가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묘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대신들의 눈이 일제히 쏠렸다.
그는 자신의 꾀를 차근차근히 설명해 갔다. 이간질이었다.

서주자사 이유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납의 아저씨인 그는 이정기의 영향력으로 서주의 통치를 맡게 된 사람.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황제의 사신이 은밀하게 접근했다.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황제의 유혹은 달콤했다.
이유는 조정에 ‘서해기관찰사’와 ‘해주이기자사’란 벼슬을 요구했다.
덕종이 그의 요구를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사신이 황제의 뜻을 전하자, 이유는 서주를 들어 당에 투항했다.

서주는 이납 영토의 남쪽 방어선이었다. 남방 마지노선이 뚫린 것이었다.
이납은 당황했다. 당은 양자강과 회하의 수로를 회복, 군수품 보급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불운은 계속됐다. 북방전선의 요지 복양을 지키던 전열이 정부군에게 쫓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납은 대장 위준에게 병사 1만을 주어 전열을 구하도록 했다.
하지만 위준은 하동 인근에서 절도사 마수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복양이 함락된 것이었다.

전세는 역전됐다. 이납은 남쪽과 북쪽의 방어선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배반이 이어졌다.
덕주를 지키던 이사진과 체주를 지키던 이장경도 조정에 항복을 한 것이었다. 당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이납의 기세를 꺾기 위해, 투항한 이사진에게 어사중승이란 벼슬을 내리고 덕주 자사로 임명했다.
또 이장경에게는 간교비서감이란 벼슬과 함께 체주 자사의 지위를 부여했다. 동맹군은 크게 흔들렸다.

이납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고구려의 피를 나눈 장군들이 배반을 했다는 사실에 그는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이납은 즉시 군사를 모았다.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서주 공략에 나섰다.
황제도 방비에 착수했다. 서주 인근의 전 군에 동원령을 내린 것이었다.
때는 781년 11월. 양측은 서주의 행정요지 팽성(오늘날의 동산지역)에서 맞붙었다.
팽성의 산세는 몹시 험했다.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갖춘 뒤 공략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납은 성급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결과는 이납의 패배였다.
팽성전투에 참가했던 이납의 군사 1만명은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상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납의 군대가 패하자 회남 절도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해주 자사 왕보가 당에 투항했고,
밀주 자사 마만용도 그 다음달인 12월 항복을 선언했다.

이납의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하지만 이납은 역시 맹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패인을 면밀히 분석했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 전열을 가다듬은 이납은 이듬해인 782년 1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조정에 빼앗겼던 해주와 밀주의 2개 주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해주와 밀주를 빼앗긴 당나라 장군 진소유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이납의 군사가 자신을 쫓는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을 결심한다. 그는 참모 온열을 이납에게 보냈다.

“호주·수주·서주·노주 등의 여러 주에서는 이미 싸움이 끝났습니다.
황제군은 무장을 해제한 채 폐하의 칙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소유는 충성을 다짐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당시의 기록은 이때 진소유가 ‘폐하’라는 표현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정기와 이보신을 ‘두 황제’라 칭했던 중국 역사책 구당서의 기록과 연계시켜 볼 수 있다.
당시 사회가 이정기 부자를 임금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제나라 10.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 나라


10.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세운 이납

대이어 쿠데타 시도… 당 황제 덕종, 봉천으로 도망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는 부친 이정기가 죽자 “아버지의 사망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며 전쟁을 독려했었다.
동맹이 흔들리면서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부친의 유업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런 이납이 허울뿐인 당 황제를 인정할 리 없었다. 통한의 날을 보내고 있던 이납에게 오랜 친구가 찾아왔다.
이정기와 함께 ‘두 황제’로 불렸던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입장에 있었다.
중국인이 아닌 이민족 출신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제후의 자리에 오른 ‘용사’의 아들들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선대부터 이어진 전우 사이였다.

이납과 이유악은 선친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길 원했다.
당은 죽은 이정기를 태위로 추증하면서 쿠데타 세력을 달랬지만, 그 아들 이납을 후계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유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은 반역의 경력이 있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소.” 두 사람은 울분을 토했다.
“무능한 황제에게 운명을 맡길 수는 없소.” 이납과 이유악의 생각은 일치했다.
두 사람은 또 한번의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 두 명의 동지가 합세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습을 요구했던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였다.
대를 이어 다시 만난 ‘4인방’은 또 다시 동맹군을 결성, 다시 한번 당 조정을 공략하기로 결심한다.

제나라 9. 당나라와 전투


9. 당나라와 전투… 낙양 보급로 끊어


이정기의 계획은 치밀했다. 초반 전투에 밀릴 경우를 대비, 제음에서 140km가량 떨어진 서주에 2차 병력을 집결시켰다.
서주는 양자강과 회하(황하)의 물길을 타고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회(양자강과 회하)의 물품 보급로가 끊기면 정부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조정은 ‘물길’을 지키기 위해 강변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에 군사를 배치하고 1000척이 넘는 배를 정박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급한 황제 덕종은 방추병을 동원해 보급로를 지키도록 했다.
방추병은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족)의 침입에 대비하던 일종의 비상근 부대였다.
이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북쪽의 국경 수비라인이 뚫린다는 의미였다.
이정기를 막는 것이 그만큼 위급했던 것이다.

당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이정기 연합군은 한동안 강회를 얻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방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 그리고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가 병력을 이끌고 가세한 것이었다.

승자는 이정기였다. 물길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를 장악, 낙양으로 가는 수송로를 끊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천하통일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운명의 신도 용장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이정기가 악성 종양에 걸린 것이었다.

낙양 함락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측근들은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써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뽑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이정기는 781년 8월, 통한의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정기의 죽음을 알게 된 조정은 즉각 회유에 나섰다.
황제는 죽은 이정기를 태위로 추증하고, 관련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며 동맹군을 달랬다.
리더를 잃은 동맹군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중원의 피비린내가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억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