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제나라 15. 멸망


15. 고구려 유민의 왕국 낙양 장악… 부하 배신으로 몰락

이납은 사고·사도·사현·사지의 네 아들을 뒀다.
792년 이납이 세상을 뜨자 왕의 지위는 아들 이사고에게 세습됐다.
당 황제는 이정기·이납 부자의 두려움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당은 이납 때와 달리 이사고의 왕위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사고는 제나라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역시 이정기와 이납처럼 황제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것 같다.
이에 관해 역사책 신당서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덕종 황제가 승하했을 때의 일이다. 이사고는 조문 사절을 보내지도 않고 국상을 치르는 것도 거부했다.
그는 어수선한 틈을 타 당을 공격, 양주를 점령하려 했다.
이를 알게 된 강성 절도사 이원소가 이사고를 (문상에) 초대하자,
이사고는 수하의 장군들을 불러모아 ‘원소가 흉계를 꾸며 나를 유인하려 한다’고 성토한 뒤, 군사를 일으켜 치려 했다.
그러자 새 황제 순종이 이사고를 말렸다.”

조정은 이사고를 달래기 위해 ‘검교사도’란 관직을 내리고 ‘시중’에 봉했다.
그런 이사고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악성종양으로 고생하다 806년에 세상을 떴다.
그가 언제 태어나서 몇살에 죽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정은 그가 죽은 뒤 ‘태부’의 지위를 추증했다. 태부는 삼공에 해당하는 최고위직이었다.
하지만 제나라 임금 이사고가 태부라는 당의 벼슬을 우습게 여겼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사고가 세상을 뜨자, 왕위는 이복동생 이사도에게 이어진다.
이사도는 이사고의 죽음을 조정에 알리지도 않은 채, 독자적으로 취임식을 갖고 제나라의 3대 왕으로 등극한다.

물자 보관소 ‘하음’ 불태워

이사도는 적극적인 성품을 지녔던 듯하다.
선대의 유업을 이루고자 결심한 그는 일종의 게릴라 부대를 조직, 815년 낙양을 공습했다.

이사도는 낙양의 물자 보관소인 ‘하음’을 공략했다.
당시 하음에 있던 창고의 수는 무려 150만개. 저장돼 있던 군량미만 400만가마에 달했던 것으로 전한다.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는 하음의 곡식창고를 모조리 부순 뒤 불태워버리고, 회하와 낙양을 잇는 다리인 건능교를 파괴시켰다.

게릴라전에 능했던 이사도는 낙양 시내 곳곳에 사저를 짓고는 아예 군 부대를 상주시키고, 병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었다.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에게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해버린 것이었다.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는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조정은 낙양 유수 여원응에게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를 제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여원응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의 제나라 기지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황제의 부대는 고구려인의 피를 가진 제나라 병사들의 용맹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나라 병사들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공격을 하지 못하다,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사도의 게릴라전은 이후 4년 간 수시로 펼쳐졌다.
황제 헌종은 행정수도 낙양에 발을 딛지 못했다.
기록은 “황제가 (다급한 나머지) 신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다.
강한 것은 부러지는 법일까? 황제보다 강했던 ‘제왕’ 이사도의 목숨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원인은 도지병마사 유오였다.
도지병마사란 제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
유오가 반란을 꾸민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사도는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수도 운주로 불러들였다.

유오는 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보여드릴 것이 있다”며 접근, 이사도와 그의 아들을 살해한 뒤 목을 잘라 당 조정에 보냈다.
황제는 뛸 듯이 기뻐했다. 당서의 기록은 “조정이 3일 밤낮으로 잔치를 벌였다”고 전하고 있다.

제나라의 멸망했다.

제나라 14. 중국 역사서도 왕으로 기록


14. 중국 역사책도 ‘왕’으로 기록


이납은 황제의 제안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 이정기의 지위를 잇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그였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당이 먼저 이납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납은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당 조정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당서는 이에 대해 ‘이납이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시각인 듯하다.
앞뒤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두 세력 간에 타협이 이뤄진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784년 황제는 이납에게 검교공부상서·운주 자사·평로절도사·치청관찰사·검교우복사·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의 관직과 함께
‘왕권’을 의미하는 ‘철권’을 전하고 ‘농서군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철권이란 살인에 대한 면책권을 뜻하는 말로, 직할 영토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일체의 사법권을 이납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당과 제의 관계가 군사적 목적으로 얽힌 협력관계였다는 사실을 뜻한다.
다시 말해 두 나라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일종의 ‘독립국 연합’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제나라의 주력부대는 한민족의 피를 지닌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중국 역사책 당서도 이를 인정 “(제가 산동을 점령했던 55년 간) 언어와 풍속에 심한 변화가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통치를 하다 보니, 백성들의 풍습이 포악해지고 인심이 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쓴 주관적 기술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우리에게
  제나라에서 고구려의 언어가 쓰였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민족의 풍습이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제나라 임금’ 이납은 34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때는 792년. 사망원인은 그의 아버지 이정기와 같은 악성 종양이었다.
당 조정은 3일 간 정사를 폐지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까닭은 이납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왕으로서 이납의 권위는 확고했던 것 같다.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도 이납의 죽음을 ‘졸’이라 하지 않고 임금의 죽음을 일컫는 ‘훙’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도 마찬가지로 이납의 죽음을 ‘훙’이라 적으며 그의 죽음에 예를 표했다.

제나라 13. 당 나라와 정면 승부


13. 국가 건설해 당 황제와 정면승부


이제 이납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사항전을 결심한 그는 후방 운주로 진지를 옮기고 군사력을 보강했다.
운주는 이납의 아버지 이정기가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주둔했던 전략적 요지였다.

이납은 세력 보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결과가 전열과 이희열·주도·왕무준 등과 연합해 결성한 제2차 동맹군이었다.
대 제국 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군사력과 함께 거기에 걸맞은 형식을 갖춰야 했다.
제2차 동맹군은 독립국가를 수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때는 782년 11월이었다.
이납은 운주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 국호를 ‘제’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동맹군은 ‘새 나라가 생겼으며, 이납이 그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하늘에 알리는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이납은 스스로를 칭할 때 ‘과인’이라 말했다.
제나라는 각 지방행정 단위를 주로 나누고, 각 주의 행정책임자로 자사를 뒀다.
문무관료인 백관을 임명해 나라의 틀을 잡았고, 운주를 수도로 정했다.
수도의 이름은 ‘동쪽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동평부’로 바꿨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운주는 오늘날의 ‘동평’. 지금의 지명은 당시 제의 수도였던 동평부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정비가 끝나자 이납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새 나라’의 군대는 강했다. 파죽지세로 치달은 이납의 군사는 운하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던 변주를 장악했고,
이어 서주의 서쪽에 위치한 송주를 함락시켜 당나라 조정을 압박했다.
다급해진 황제 덕종은 서쪽 토번(티베트)을 지키던 군사력을 동쪽으로 돌리고, 남방의 수비를 담당하던 영남의 부대를 끌어올렸다.
시급한 것은 서쪽과 남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동쪽 제나라의 침공을 막는 일이었다.

제나라의 위세가 천하를 흔들자 이번에는 당 조정에서 이탈자들이 나왔다.
‘우승 대신’으로 있던 고관이 이납에게 군량미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조정이 흔들리자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맹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황제 덕종은 살아남기 위해, 783년 10월 봉천으로 도망을 가 버린다.

이번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은 황제측이었다.
그해 12월 덕종 황제는 봉천에서 사자를 보내 동맹군측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이 때 황제측에서 내건 조건은
  반란을 없었던 일로 치고
  관련자 모두를 사면하며
  이납·전열·왕무준·이희열 4인을 국가의 공신인 ‘훈구’로 대우하겠다는 것이었다(태평어람 권113).
‘성신문무’라 불리는 대타협 조치였다.

2016년 1월 17일 일요일

제나라 12. 복양 전투


12. 복양 공략하다 정부군에 포위돼


오랜만에 승기를 되찾은 이납은 군대를 북으로 돌려, 북방전선의 요지 ‘복양’ 탈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스물네 살의 이납은 아직 미숙했다. 또 다시 마음만 앞서는 성급함을 보였다.
침착하지 못한 이납은 직접 군사를 재촉하며 서두르다 절도사 유흡의 부대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병사들은 하나둘씩 배고픔으로 죽어갔다. 이납은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죽어가는 동지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는 판관 방설을 황제에게 보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항복 의사를 전한 것은 782년 2월. 이정기 부자의 원대한 꿈이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엉뚱한 인물의 개입으로 상황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당시의 전쟁에는 환관이 참여하고 있었다.
환관의 역할은 황제를 대신해 작전권을 행사하고 장수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납과의 싸움에서도 중사란 직함의 환관 송봉조가 개입하고 있었다.
이납의 투항 요청을 받은 송봉조는 승리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납에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사옵니다. 이납의 군사를 모조리 격파하고 이납을 주살하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송봉조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납의 세력을 과소평가 하고 있었다.
황제 덕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납의 투항 사절 방설을 옥에 가둬버렸다.
송봉조는 꿈에 부풀었다. 장수들을 불러모아 이납을 죽일 계책을 짜내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정부군도 이납의 목을 당장 따올 수는 없었다.
수뇌부가 우왕좌왕하며 묘책을 궁리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 틈을 타 이납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 버렸다.

제나라 11. 낙양 보급로 끊다


11. 낙양 물자 보급로 끊어 국고 고갈

작전의 기본 틀은 이정기와 같았다.
낙양으로 향하는 수로를 차단, 물자의 보급을 끊어 조정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병력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납과 전열은 군사를 이끌고 강회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물길의 요지 와구로 진격했다.
양숭의는 이유악과 함께 섬서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한수의 요충지, 양과 등으로 쳐들어갔다.
와구는 이정기가 낙양 공략을 시도했을 때 정부군이 군사를 배치했던 물길의 길목이었다.

엉성한 정부군은 전열을 정비한 쿠데타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와구와 양·등은 순식간에 점령됐다.
조정은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남쪽에서 생산된 물자는 당의 수도로 공급되지 못했고, 장안과 낙양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장안은 물자의 자체조달이 불가능한 도시였다. 수도의 백성들은 물품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조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황제는 망연자실해 했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동맹군의 세력을 꺾을 방도가 없었다.
“대책이 없겠는가?” 황제는 백관을 소집해 방책을 구했다.
제국의 수도가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묘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대신들의 눈이 일제히 쏠렸다.
그는 자신의 꾀를 차근차근히 설명해 갔다. 이간질이었다.

서주자사 이유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납의 아저씨인 그는 이정기의 영향력으로 서주의 통치를 맡게 된 사람.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황제의 사신이 은밀하게 접근했다.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황제의 유혹은 달콤했다.
이유는 조정에 ‘서해기관찰사’와 ‘해주이기자사’란 벼슬을 요구했다.
덕종이 그의 요구를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사신이 황제의 뜻을 전하자, 이유는 서주를 들어 당에 투항했다.

서주는 이납 영토의 남쪽 방어선이었다. 남방 마지노선이 뚫린 것이었다.
이납은 당황했다. 당은 양자강과 회하의 수로를 회복, 군수품 보급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불운은 계속됐다. 북방전선의 요지 복양을 지키던 전열이 정부군에게 쫓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납은 대장 위준에게 병사 1만을 주어 전열을 구하도록 했다.
하지만 위준은 하동 인근에서 절도사 마수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복양이 함락된 것이었다.

전세는 역전됐다. 이납은 남쪽과 북쪽의 방어선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배반이 이어졌다.
덕주를 지키던 이사진과 체주를 지키던 이장경도 조정에 항복을 한 것이었다. 당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이납의 기세를 꺾기 위해, 투항한 이사진에게 어사중승이란 벼슬을 내리고 덕주 자사로 임명했다.
또 이장경에게는 간교비서감이란 벼슬과 함께 체주 자사의 지위를 부여했다. 동맹군은 크게 흔들렸다.

이납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고구려의 피를 나눈 장군들이 배반을 했다는 사실에 그는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이납은 즉시 군사를 모았다.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서주 공략에 나섰다.
황제도 방비에 착수했다. 서주 인근의 전 군에 동원령을 내린 것이었다.
때는 781년 11월. 양측은 서주의 행정요지 팽성(오늘날의 동산지역)에서 맞붙었다.
팽성의 산세는 몹시 험했다.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갖춘 뒤 공략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납은 성급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결과는 이납의 패배였다.
팽성전투에 참가했던 이납의 군사 1만명은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상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납의 군대가 패하자 회남 절도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해주 자사 왕보가 당에 투항했고,
밀주 자사 마만용도 그 다음달인 12월 항복을 선언했다.

이납의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하지만 이납은 역시 맹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패인을 면밀히 분석했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 전열을 가다듬은 이납은 이듬해인 782년 1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조정에 빼앗겼던 해주와 밀주의 2개 주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해주와 밀주를 빼앗긴 당나라 장군 진소유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이납의 군사가 자신을 쫓는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을 결심한다. 그는 참모 온열을 이납에게 보냈다.

“호주·수주·서주·노주 등의 여러 주에서는 이미 싸움이 끝났습니다.
황제군은 무장을 해제한 채 폐하의 칙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소유는 충성을 다짐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당시의 기록은 이때 진소유가 ‘폐하’라는 표현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정기와 이보신을 ‘두 황제’라 칭했던 중국 역사책 구당서의 기록과 연계시켜 볼 수 있다.
당시 사회가 이정기 부자를 임금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제나라 10.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 나라


10.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세운 이납

대이어 쿠데타 시도… 당 황제 덕종, 봉천으로 도망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는 부친 이정기가 죽자 “아버지의 사망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며 전쟁을 독려했었다.
동맹이 흔들리면서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부친의 유업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런 이납이 허울뿐인 당 황제를 인정할 리 없었다. 통한의 날을 보내고 있던 이납에게 오랜 친구가 찾아왔다.
이정기와 함께 ‘두 황제’로 불렸던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입장에 있었다.
중국인이 아닌 이민족 출신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제후의 자리에 오른 ‘용사’의 아들들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선대부터 이어진 전우 사이였다.

이납과 이유악은 선친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길 원했다.
당은 죽은 이정기를 태위로 추증하면서 쿠데타 세력을 달랬지만, 그 아들 이납을 후계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유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은 반역의 경력이 있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소.” 두 사람은 울분을 토했다.
“무능한 황제에게 운명을 맡길 수는 없소.” 이납과 이유악의 생각은 일치했다.
두 사람은 또 한번의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 두 명의 동지가 합세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습을 요구했던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였다.
대를 이어 다시 만난 ‘4인방’은 또 다시 동맹군을 결성, 다시 한번 당 조정을 공략하기로 결심한다.

제나라 9. 당나라와 전투


9. 당나라와 전투… 낙양 보급로 끊어


이정기의 계획은 치밀했다. 초반 전투에 밀릴 경우를 대비, 제음에서 140km가량 떨어진 서주에 2차 병력을 집결시켰다.
서주는 양자강과 회하(황하)의 물길을 타고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회(양자강과 회하)의 물품 보급로가 끊기면 정부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조정은 ‘물길’을 지키기 위해 강변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에 군사를 배치하고 1000척이 넘는 배를 정박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급한 황제 덕종은 방추병을 동원해 보급로를 지키도록 했다.
방추병은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족)의 침입에 대비하던 일종의 비상근 부대였다.
이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북쪽의 국경 수비라인이 뚫린다는 의미였다.
이정기를 막는 것이 그만큼 위급했던 것이다.

당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이정기 연합군은 한동안 강회를 얻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방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 그리고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가 병력을 이끌고 가세한 것이었다.

승자는 이정기였다. 물길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를 장악, 낙양으로 가는 수송로를 끊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천하통일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운명의 신도 용장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이정기가 악성 종양에 걸린 것이었다.

낙양 함락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측근들은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써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뽑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이정기는 781년 8월, 통한의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정기의 죽음을 알게 된 조정은 즉각 회유에 나섰다.
황제는 죽은 이정기를 태위로 추증하고, 관련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며 동맹군을 달랬다.
리더를 잃은 동맹군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중원의 피비린내가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억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제나라 8. 최강 절도사


8. 15개 주 다스리던 ‘최강 절도사’


5년 뒤인 781년 정월, 이정기와 고락을 함께 했던 성덕 절도사 이보신이 숨을 거뒀다.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은 절도사 지위를 세습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 덕종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유악을 지지하던 이정기·양숭의·전열 등 당대의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 ‘4인방’은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당 조정을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결심한 것이다.

당시 이정기가 다스리던 영역은 도합 15개 주. 이는 오늘날 한반도 크기에 버금가는 넓이였다.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법령을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중앙의 권력은 너무도 취약해 있었고 황제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정기는 달랐다. 발해의 법체계를 응용해 법률을 정비하고 독립된 조세제도를 만들어 엄정하고 일관되게 적용했다.
독립된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역사책 구당서는 이 때의 이정기와 이보신을 ‘두 황제’라 표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최강의 절도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그들을 당시 사회가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쿠데타를 결심한 이정기는 청주에서 운주로 거처를 옮겼다.
운주는 산동과 낙양을 잇는 길목. 이정기의 첫 번째 공략 목표는 제국의 ‘동쪽 수도’ 낙양이었던 것이다.

이정기는 청주의 관리를 아들 이납에게 맡기고 낙양 공략에 몰두했다. 이정기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자신이 전사할 경우에 대비, 이납에게 ‘치청절도유후’라는 직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영토를 세습한다는 의미로 황제가 아니면 행할 수 없었던 파격적 조치였다.

조정은 긴장했다. 가장 강력한 절도사의 병력이 낙양의 코앞, 운주에 진을 친 것이었다.
이정기는 주야로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쟁을 준비했다. 조정도 방위에 착수했다.
낙양과 운주 중간에 위치한 변주(오늘날의 개봉)에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이 성을 축조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정기는, 경계지역인 제음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당시 장안을 수비하던 황제 직할대의 병력은 5만.
이정기가 동원한 10만 병력은 당시로선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엄청난 수의 군사였다.

당나라는 십일세란 세금을 새로 거둬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천하에 동원령을 내려 9만2000명의 병력을 제음 부근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때는 781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제나라 7. 행정가 이정기


7. 행정가로서의 이정기


구당서 124권 ‘이정기전’은 그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정기는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 엄할 뿐 아니라 가혹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여러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는 치·청·제·해·등·래·기·밀·덕·체 등 10여개 주를 관장하면서
이보신·영호창·설숭·양숭의·전승사 등의 절도사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당서

618년 당나라를 세운 '고조'부터 907년 나라를 잃은 '애제'에 이르기까지 21세 290년 간의 일을 기록한 정사다.
당서는 이정기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적 리더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절도사들과 친분을 구축해 왔으며 그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당서 ‘양숭의전’은 “이정기·이보신·설숭·양숭의·전승사 등 5명의 절도사들이 당의 고관직을 독점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가섭원 부여 3. 대소


3세 대소 재위 28년

을 묘 원년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성하고 왕자를 인질로 삼자고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

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계유 19년 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 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 오 28년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 나

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의 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라 한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

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하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더니, 혼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가 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 없다. 갈사는 두루 안

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

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

치하였다. 그의 등에 띄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

곡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AD 494)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 끝 -
 
주; 여기서 대소왕이후 동부여는 망하여 둘로 갈린다.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로 옮겼다가 고구려의 동부여후가 되었고, 동부여의 옛도

읍에서는 대소왕의 친척 동생이 고구려에 항복하여 낙씨성을 받아서 고구려의 연나부가 되었다가 자립하여 개원서북으로 옮겼으나 결

국 다시 연나부에 편입하였다.
갈사는 혼춘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분릉 즉 동부여의 옛도읍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졸본과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될 뿐이며, 주몽이

분릉에서 도망칠때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는 말로 미루어 분릉의 동남쪽에 졸본이 있었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지만, 문장상으로 그렇

다는 말은 없다.
 

가섭원 부여 2. 금와


2세 금와 재위 41년

갑신 원년 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정유 24년 유화 부인이 돌아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는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
갑인 41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하였다.

가섭원 부여 1. 시조 해부루


 
가섭원 부여기 ( 동부여 )
휴애거사 범장 지음

             - 한단고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원년 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

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 유년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

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

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 인 8년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 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

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

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 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로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

름을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

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 진 10년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르자 큰 돌을 마주

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이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

더라. 왕은 봅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 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고 하고

그가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 술 28년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

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계유 39년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12세 단군 아한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정해 원년(BC 1834)
무 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 여홍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 29년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무인 52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홀달이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경 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의 가장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환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 조술하신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겨 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원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는 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리
모든 것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글을 새겼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 해 46년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의 단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지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하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이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하다.

10세 단군 노을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신묘 원년(BC 1950) 처음으로 큰 동물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이셨는데, 어가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을미 5년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들까지 크게 기뻐했다.
병오 16년 동문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줄 모르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 처음으로 감성을 두었다.
기축 5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2016년 1월 15일 금요일

제나라 6. 국제무역 통해 자금 확보


6. 당~발해~신라~왜 국제무역 통해 자금 확보


이정기는 위덕 절도사 이보신과 힘을 합쳤다.
한 달 이상 이어진 전투에서 이정기는 전승사를 격파, 그의 영역이었던 덕주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776년 정월, 이정기는 전승사의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전투는 8개월 간 계속됐다. 그 결과 이정기는 2개의 주를 추가로 합병하고 적장 전승사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니 예의를 갖춰 대하라.” 이정기는 병사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직접 포로 전승사를 찾아가 깍듯하게 예우했다. 뿐만 아니었다.
수차에 걸쳐 황제에게 상소를 보내 전승사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엔 자신의 손으로 전승사를 석방시켜 주었다. 애써 생포한 전승사를 이정기는 왜 풀어준 것일까?

그가 의식했던 것은 다른 절도사들의 눈이었다. 당의 운명은 몇몇 절도사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전승사를 공격하긴 했지만, 이정기에겐 조정보다 절도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전승사는 이 일로 인해 이정기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전승사 사망 후, 그 자리를 이은 전열이 이정기와 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전승사를 잡았다 풀어줌으로써 이정기는 조정과 절도사들,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황제는 전승사를 제압해 준 이정기에게 ‘검교사공·동중서문하평장사’란 관직을 내렸다.
검교사공은 삼공의 지위 중 하나. 동중서문하평장사란 이정기를 재상으로 봉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조정이 이정기의 협조없이 지방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제나라 5.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5.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당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이 관직은 당~신라~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왕래를 총괄하는 것으로
낙양 동쪽에서 일어나는 사안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무역은 ‘동양의 로마’ 당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당시 신라는 연1회 이상 당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신라 사신이 당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정기를 거쳐야 했다. 바다 교통의 요지 등주와,
육상 교통의 중심지 영주가 모두 그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발해도 마찬가지였다. 766~779년까지 13년 간, 발해는 무려 143회에 걸쳐 당으로 공식사절을 파견했다.
이정기는 당~발해뿐 아니라 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무역을 관장했다. 여기에 수반되는 음성적 상거래도 물론 그의 몫이었다.

이정기의 ‘시장’에서 조정은 방관자였다.
이곳에서는 발해의 말을 포함, 당이 발해로부터 수입을 금하고 있던 금·은·동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정기가 장악하고 있던 산동은 예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옥토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염전이 있었다. 소금은 당시 가장 값비싼 재화의 하나였다.
766~779년 사이에 당이 거둔 국고수입의 절반은 소금을 통해 얻은 염리였다.
이정기는 소금 판매와 회수의 조운, 국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훗날 황제와의 싸움을 가능하게 해준 밑천이 된다.

당은 번진 세력의 발호와 이민족의 침입, 환관의 횡포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번진은 위박 절도사인 전승사.
그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의 딸과 결혼시킨 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황제 대종은 전승사를 제거해야 했다. 이 때 그가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이정기였다.

제나라 4. 오랑캐 제압


4. 무술 뛰어나 일격에 오랑캐 제압


병사들은 무술이 뛰어나고 성격이 침착한 이정기를 따랐다. 그런 이정기를 시기한 것은 뜻밖에도 절도사 후희일이었다.
후희일은 고종사촌 이정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기 자리를 뺏길까봐 불안해하던 후희일은 이정기에게 주었던 병마사직을 박탈한 뒤 엉뚱하게도 불탑 건립에 몰두했다.
그러자 공사에 동원된 병사들로부터 불평이 터져나왔다. 반감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후희일은 불교뿐 아니라 미신에도 빠져 있었다. 가는 곳 마다 점쟁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날도 그는 무당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갔었다. 군사들은 그 틈을 노렸다.
후희일이 성을 비우자 성문을 닫아 걸고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
성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느냐?”
“열어드릴 수 없소.”

차가운 목소리가 반응했다. 후희일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희일은 분노했다. 그를 수행했던 부대는 많지 않았지만 노한 후희일은 앞뒤를 가리지 못했다.
“성을 공격하라.” 후희일이 명령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후희일은 병사들의 반격에 쫓겨 도망가고 말았다.

이 반란을 이정기가 사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조정은 이정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 대한 장악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평로치청절도관찰사·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검교공부상서·겸어사대부·청주자사를 제수하면서
‘이정기’란 새 이름을 내렸다. 이 때가 765년, 이정기의 나이 33세의 일이다.

제나라 3. 고구려 유민의 왕국 이정기의 제나라


3.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터 닦은 이정기


뛰어난 무공으로 절도사 자리 장악해 15개주 통치

  ‘고구려인’ 이정기는 73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회옥. 영주는 당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였던 ‘평로’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조양시다.

이정기는 무술에 능했다. 그의 무공에 대해 중국 역사책 ‘구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투르크계 위구르족인) 회흘 병사가 제멋대로 행동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러자 이정기가 가장 센 회흘 병사에게 결투를 청했다. 사람들은 모두 ‘회흘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정기가 회흘의 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회흘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 사건으로 이정기는 군인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때는 758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리더십을 발휘하던 그에게 한 가지 사건이 터졌다.
‘평로’의 절도사로 있던 왕현지가 사망한 것이었다.

절도사가 죽자 관료들은 후계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여론은 왕현지의 아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이정기의 야심은 그렇지 않았다. ‘유력 후보’만 제거하면 되는 일이었다. 26세의 이정기는 칼을 뽑았다.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었다.

이정기는 같은 고구려인이자 자신의 고종사촌인 후희일을 내세웠다. 조정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병사들의 ‘영웅’ 이정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로는 수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던 ‘한민족의 땅’이었다.

안사의 난(755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황제 숙종은 타협을 택했다.
762년 후희일을 평로 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군인에 의해 절도사가 옹립된 당나라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평로를 얻은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위덕 절도사 이보신과 하북에서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찬스가 왔다. 산동반도의 청주에서 무장 사조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정은 평로 절도사에게 진압을 명했다. 선봉은 이정기였다.

이정기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주와 범양에서 사조의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패한 반군은 청주로 몰렸다. 청주는 현재의 익도로, 반군의 본거지였다.
이정기는 사조의를 끝까지 추격, 청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로로 이정기와 후희일은 평로·치청·기주·제주·밀주·해주 일대를 관할하게 된다.

제나라 2. 고구려 유민


2. 고구려 유민


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의 4대에 걸친 활약상은
신당서, 구당서, 책부원구, 자치통감, 태평어람등에도 나와있다.

정사로 인정할 수 있다

고려대 김 택민 교수 : 신당서와 구당서에 나와있는 기록이라면 정사로 볼수있다.
숭실대 김 문경 교수 : 이 정기에 대한 논문은 10년전에 내가 쓴것과
                      지 배선 교수가 쓴것 2편이 있다.

제나라의 무대였던 하북과 산동지방에 고구려 유민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사실
제나라를 일으킨 이씨 일가를 ‘고구려인’이라고 명기한 점
제나라 체제하에서 산동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고 기록된 점
제나라가 망할 때 당이 고구려계 군인 1200명을 집단학살했다는 점
제나라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후손
정복한 나라의 군인을 집단 사살한 것은 당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신라왕을 책봉했던 것과 달리,
제나라 시조 이납은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뒤 독자적인 국호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신라보다 독립성이 강했다.

제나라 1. 이정기 제나라



1. 이정기 제나라

             -. 숭실대 김 문경 교수 논문.
             -. 연세대 지 배선 교수 논문.
             -. 신당서, 구당서 이정기 열전.
             -. 책부원구, 자치통감, 태평어람

고구려 유민의 왕국
당나라에 대항해 건설 4대에 걸쳐 55년간 산동반도를 통치했다.

이정기의 제나라는 4대 55년간 지속 되었다.

제 1 대. 이정기(765~781)
제 2 대. 이납  (781~792) 이정기의 아들
제 3 대. 이사고(792~806) 이납의 아들
제 4 대. 이사도(806~819) 이사고의 이복동생

중국의 산동성 전체와 하북, 하남, 안휘성 일대에 제나라를 세워
동맹지역을 포함하면 당나라땅의 3분의 2를 다스렸다.

고구려의 유민들이 당나라 조정에 대항, 지금의 산동반도에 독립국가 ‘제’를 세우고 55년 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총 5회 이상 대군을 일으켜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

고구려인 이정기의
  제나라는
    독자적인 법령과 조세제도를 구비하고
    문무백관을 임명한 뒤
    자체적 지방행정 단위와 통치조직을 갖춘 독립국가로
  제를 세운 이씨 일가는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

대가야




대가야

      - 남당유고


1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생몰년 ? ~ ?) 재위 A.D.158 ~ A.D.177
     대가야의 시조

파사이사금기 33년(A.D.158) 11월 가야세주 정견(正見)이 죽어 아들 주일(朱日)이 섰다. 스스로 아시금(阿豉今)이라 칭하였다.


2대. 아수왕(阿修王) (생몰년 ? ~ 219) 재위 A.D.177 ~ A.D.219

지마기 19년(A.D.177) 7월 가야군 아수(阿修)가 섰다
일성기 9년(A.D.200)  5월 금관 거등(居登)이 그 여동생 비가(毗可)를 가야 아수(阿修)에게 시집보냈다.
고구려사초 제12세 중천대제기 중, 12년(AD259) 이 때, 가락(駕洛)국의 거등(居登)이 죽었다.


3대. 비가여왕(毗可女王) (생몰년 ? ~ 231) 재위 A.D.219 ~ A.D.231

아달라기 7년(A.D.219) 7월 가야(加耶) 아수(阿修)가 죽어, 그의 처 비가(毗可)가 스스로 섰다.
                          서자(庶子) 우리(宇理)를 새로운 남편으로 삼았다.


4대. 미리신여왕(美理神女王) (생몰년 A.D.223 ~ 281) 재위 A.D.231 ~ 269

아달라기 19년(A.D.231)  2월 가야(加耶)의 (여)군(君) 비가(毗可)가 죽었다. 딸 미리신(美理神)이 섰다.
                            우리(宇理)를 남편으로 삼았다.
아달라기 11년(A.D.223)  4월 (가야의) 비가(毗可, 금관출신)가 우리(宇理)의 딸 미리(美理)를 낳았다.
벌휴기 25년(A.D.281)    7월 가야여군(加耶女君) 미리신(美理神)이 죽었다. 술명(述明)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5대. 하도여왕(河道女王) (생몰년 237~ 282) 재위 A.D.269~ 282

내해기 13년(A.D.269) 9월 가야(加耶)가 입조하여 하도(河道)가 새로 왕이 되었음을 보고하였다.
                         미지(美知)에게 가서 효수(孝修)를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아달라기 25년(A.D.237) 2월 (가야) 미리신(美理神)이 하지(河智)의 딸 하도(河道)를 낳았다.
벌휴기 26년(A.D.282) 9월 가야(加耶)의 하도(河道)가 죽어 딸 하리(河理)가 왕이 되었다.


6대 하리여왕(河理女王)(생몰년 261 ~ ?) 재위 A.D.282 ~ 287

벌휴기 26년(A.D.282) 9월 가야(加耶)의 하도(河道)가 죽어 딸 하리(河理)가 왕이 되었다.
내해기 5년(A.D.261)  9월 (가야) 미리신(美理神)이 하도(河道)의 딸 하리(河理)를 낳았다.


7대 효도왕(孝道王)(생몰년 254 ~ 318) 재위 A.D.287 ~ 313

내해기 31년(A.D.287) 3월 가야(加耶) 여군(女君) 하리(河理)가 남편 효도(孝道)에서 선위하였다.
벌휴기 11년(A.D.254) 5월 미리신(美理神)이 효수(孝修)의 아들 효도(孝道)를 낳았다.
첨해기 9년(A.D.318)  9월 가야(加耶)의 노군 효도(孝道)가 죽었다.
                         차리(車理, 미지와 대리의 아들)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8대 하리지여왕(河理智女王)(생몰년 ? ~ 341)

재위 A.D.313 ~ 341)

첨해기 4년(A.D.313) 정월
가야(加耶)의 왕 효도(孝道)가 그의 딸 하리지(河理智)에게 선양을 하고, 선위(宣威)를 맞이하여 사위로 삼았다.

미추기 17년(A.D.341)
10월 가야(加耶)의 여자 임금 하리지(何理智)가 죽었다, 딸 선실(宣失)이 이어 왕이 되었는데, 거듭 수극(守克)을 남편으로 삼았다



9대 선실여왕(宣失女王)(생몰년 327~ 389)

재위 A.D.341 ~ 352

미추기 17년(A.D.341)
10월 가야(加耶)의 여자 임금 하리지(何理智)가 죽었다, 딸 선실(宣失)이 이어 왕이 되었는데, 거듭 수극(守克)을 남편으로 삼았다

미추기 3년(A.D.327)
3월 가야(加耶)의 여자 임금 하리지(河理智)가 선위(宣威)의 딸 선실(宣失)을 낳았다. 차리(車理)에게 입공(入貢)을 하도록 명하고, 나아가 동정(動靜)을 여쭈도록 하였다. 자의(紫衣)를 내리도록 하였다.

내물기 13년(土牛:기축389)
정월, 경도(京都)에 크게 역병이 돌고 가야(加耶) 또한 크게 역병이 돌아 선실태후(宣失太后)가 역질로 붕(崩)했다. 제(帝)가 그를 위해 궁중에서 발상(發喪)하며 말했다.
“선실(宣失)은 곧 우리 사씨(思氏)의 어머니이니 또한 나의 어머니 아닌가.”
명을 내려 그에게 후한 부의를 보내도록 했다. 궁중에서 많이 그를 위하는 효(孝)로써 제(帝)에게 아첨하였다.



10대 수극왕(守克王)(생몰년 A.D.304 ~ 377)

재위 A.D.352 ~ 377

유례이사금 3년(A.D.352)
가야(加耶)의 선실(宣失)이 수극(守克)에게 선위를 하였다.

조분기 13년(A.D.304)
9월 수라(守羅)가 (가야) 효도(孝道)의 아들 수극(守克)을 낳았다.
아달라阿達羅(미시美時-미리신美理神의 여동생) - 미라美羅
하도河道(미라美羅) - 하라河羅
내해奈解(하라河羅) - 수라守羅

내물기 원년(A.D.377)
11월 가야(加耶)의 왕 수극(守克)이 죽어 모가(慕訶)가 섰다. 선실(宣失)이 태후가 되었다. 당시 가야는 왜가 상통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선실의 말을 듣지 않고 왜왕녀를 처로 삼았다. 사신을 보내어 꾸지람을 하였다.



11대 모가왕(慕訶王)(생몰년 346 ~ 403)

재위 A.D.377 ~ 403

내물기 원년(A.D.377)
11월 가야(加耶)의 왕 수극(守克)이 죽어 모가(慕訶)가 섰다. 선실(宣失)이 태후가 되었다. 당시 가야와 왜가 상통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선실의 말을 듣지 않고 왜왕녀를 처로 삼았다. 사신을 보내어 꾸지람을 하였다.


미추기 22년(A.D.346)
8월 가야(加耶)의 임금 선실(宣失)이 수극(守克)의 아들 모가(慕訶)를 낳았다.

실성기 2년(계묘403)
5월 가야군(加耶君) 모가(慕訶)가 졸(卒)하고 딸 후섬(厚蟾)이 섰다.



12대. 후섬여왕(厚蟾女王)(생몰년 ? ~ ?)

재위 A.D.403 ~ 414

실성기 2년(계묘403)
5월 가야군(加耶君) 모가(慕訶)가 졸(卒)하고 딸 후섬(厚蟾)이 섰다.

[후섬(厚蟾) 왜왕(倭王)의 딸 혹은 야왕(野王)의 딸과 모가(慕訶)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추측된다.]



13대 사가왕(舍訶王)(생몰년A.D.369~ 428)
재위 A.D.414 ~ 428

실성기 13년 (갑인414)
삼월 가야(加耶)의 여군(女君) 후섬(厚蟾)이 그 남편 사가(舍訶)를 왕(王)으로 삼았다.

기림기 6년(A.D.369)
2월 가야(加耶)의 안주인 선실(宣失)이 수극(守克)의 아들 사가(舍訶)를 낳았다.

눌지기 12년 (무진428)
9월, 가야(加耶)의 사가(舍訶)가 병몰(病沒)하자 장녀 섬신(蟾神)이 즉위하여 그 종형 삼광(三光)을 남편으로 삼았다.



14대 섬신여왕(蟾神女王)(생몰년 ? ~ 463)

재위 428 ~ 463

눌지기 12년 (무진428)
9월, 가야(加耶)의 사가(舍訶)가 병몰(病沒)하자 장녀 섬신(蟾神)이 즉위하여 그 종형 삼광(三光)을 남편으로 삼았다.

유례기 (A.D. 463)
가야의 여왕 섬신(蟾神)이 죽어 그의 딸 아리(阿利)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15대 아리여왕(阿利女王)(생몰년 431 ~ 491)

재위 A.D. 463 ~ 491

유례기 (A.D. 463)
가야의 여왕 섬신(蟾神)이 죽어 그의 딸 아리(阿利)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눌지기 15년 (A.D. 431)
7월 섬신(蟾神)이 삼광(三光)의 딸 아리(阿利)를 낳았다.

소지기 (A.D. 491)
가야의 여왕 아리(阿利)가 병으로 죽었다. 성국(誠國)이 왕이 되었다. 청화(靑華)를 왕비를 삼길 청하여 허락하였다.



16대 성국왕(誠國王)(생몰년 442 ~ 506)

재위 491 ~ 506

소지기 (A.D. 491)
가야의 여왕 아리(阿利)가 병으로 죽었다. 성국(誠國)이 왕이 되었다. 청화(靑華)를 왕비를 삼길 청하여 허락하였다.

눌지기 26년(A.D.442)
2월 섬신(蟾神)이 도광(道光)의 아들 성국(誠國)을 낳았다.

지증기 7년(A.D. 506)
7월 성국(誠國)이 죽어 청렵(靑巤)이 왕이 되었다.



17대 청렵여왕(靑巤女王)(생몰년 A.D. 476 ~ ?)
재위 A.D. 506 ~ 524

지증기 7년(A.D. 506)
7월 성국(誠國)이 죽어 청렵(靑巤)이 왕이 되었다.

자비기 (A.D. 476)
청화(靑華)가 성명(讚明)의 딸 청렵(靑巤)을 낳았다. 가야가 사신을 보내 알려오고, 가야의 특산물을 바쳤지만 사양하였다.



18대 이뇌왕(異腦王)(A.D. 494 ~ ?)

재위 A.D. 524 ~ ?

법흥기 11년(A.D. 524)
왕이 청렵(靑巤)을 국경에서 만나 행차하였다. 청렵은 권처(權妻)로 삼아주기를 원하며, 죽을 때까지 왕을 섬기고자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가야(加耶)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청명(靑明)을 북국(北國), 이뇌(異腦)를 남국(南國)(왕)으로 삼았다.

소지기 (A.D. 494)
청렵(靑巤)이 성국(誠國)의 아들 이뇌異腦를 낳았다.



19대 도설지(道設智; 월광月光)(생몰년 A.D. 524 ~?)

재위 ? ~ 562

법흥기 11년(A.D. 524)
3월 양화(兩花)가 아들 월광(月光)을 낳았다. 옥진궁에서 사신을 보내어 신라의 특산물을 주었다.

비지比智(조리助里) - 호조好助 , 내숙乃宿(조생鳥生) - 선혜善兮
호조好助(선혜善兮) - 양화兩花

2016년 1월 14일 목요일

15. 침류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5대 침류왕<枕流王  384~385  재위기간 1년>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9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진 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2년 봄 2월,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중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14. 근구수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375~384  재위기간 9년>
근구수왕[휘수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 사유가 직접 와서 침범하였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는 반걸양에 이르러 전투를 시작하려 하였다. 고구려인 사기는 원래 백제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나게 하였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었다. 그가 이 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고구려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 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태자가 이 말에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 도착하였다. 이 때 장수 막고해가 간하였다.
"일찌기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읍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중단하였다. 그는 즉시 그곳에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가?"
그곳에는 말발굽 같이 생긴 바윗돌 틈이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태자의 말굽 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2년, 왕의 외삼촌 진고도를 내신 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5년 여름 4월, 흙비가 종일 내렸다.
6년,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여름 5월, 땅바닥이 깊이가 다섯 길, 넓이가 세 길이나 되게 갈라졌다가 3일만에 다시 붙었다.

8년, 봄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가 나타나자, 왕이 나라의 곡식을 내어 대신 값을 물어 주었다.
10년 봄 2월,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 왕이 붕어하였다.

13. 근초고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재위기간 29년>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설왕이 붕어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2년 봄 정월,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을 조정 좌평으로 삼았다. 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다. 그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21년 봄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23년 봄 3월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사신을 시켜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26년,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27년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28년 가을 7월,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 성주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다.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고기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와서 박사 고 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 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12. 설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2대 설왕<契王  344~346  재위기간 2년>
설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전에 분서왕이 붕어하였을 때는 설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는데,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붕어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3년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11. 비류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1대 비류왕<比流王  304~344  재위기간 40년>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끼며, 또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떨쳤다. 분서왕이 붕어하였을 때, 비록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으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그가 왕위에 올랐다.
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9년 봄 2월, 사신을 파견하여 민간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들로서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 일인당 곡식 3석씩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10년 봄 정월, 남쪽 교외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이 직접 제물에 쓰일 고기를 베었다.
13년 봄, 가뭄이 들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 서울에서 우물이 넘치고, 그 속에서 흑룡이 나타났다.

17년 가을 8월, 대궐 서쪽에 활 쏘는 누대를 쌓아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18년 봄 정월, 왕의 이복동생 우복을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22년 겨울 10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풍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11월, 왕이 구원 북쪽에서 사냥하여 직접 사슴을 쏘았다.

24년 가을 7월, 적오와 같이 생긴 구름이 양쪽에서 해를 끼고 있었다.
9월, 내신 좌평 우복이 북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다.

28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풀과 나무와 강물이 말랐다. 가을 7월에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었다.
30년 여름 5월, 별이 떨어졌다. 대궐에 화재가 났는데 연이어 민가도 불탔다.
가을 7월, 대궐을 수리하였다. 진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우레가 쳤다.

32년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33년 봄 정월 신사에 혜성이 규성 성좌에 나타났다.
34년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41년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10. 분서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0대 분서왕<汾西王  298~304  재위기간 6년>
분서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풍채가 걸출하였으므로 왕이 그를 사랑하여 항상 옆에 두었다. 왕이 붕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5년 여름 4월, 낮에 혜성이 나타났다.
7년 봄 2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9세 단군 아슬


9세 단군 아슬 재위 35년

병 진 원년(BC 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리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진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정 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경인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8세 단군 우서한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하였다.
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신해 4년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궁궐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고쳤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을묘 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슬이 즉위했다.

7세 단군 한율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갑인 원년(BC 2047) 
정미 54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서한 즉위하다.

2016년 1월 12일 화요일

9. 책계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9대 책계왕<責稽王  286~298  재위기간 12년>
책계왕[혹은 청계라고도 한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 고이왕이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13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8. 고이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8대고이왕<古王 234~286  재위기간 52년>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붕어하자, 그의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므로 초고왕의 동복 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3년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여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5년 봄 정월,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왕이 부산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갔다.

6년 봄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여름 5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7년, 군사를 보내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여름 4월,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내외의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겼다.
가을 7월, 석천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이 때 냇가에서 오리 한 쌍이 날아 가는 것을 왕이 쏘아서 모두 적중시켰다.

9년 봄 2월, 백성들로 하여금 남쪽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숙부인 질을 우보로 삼았다. 질은 성격이 충직하여 실수없이 일을 계획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서문 밖에 나가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10년 봄 정월, 큰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13년 여름, 크게 가물어 보리가 죽었다.
가을 8월, 위 나라 유주 자사 관구 검이 낙랑 태수 유 무, 삭방 태수 왕 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 보냈다.

14년 봄 정월,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진충을 우보로 임명하였다.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고 또한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16년 봄 정월 갑오, 태백성이 달을 덮었다.
22년 가을 9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군과 괴곡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신라 장수 익종을 죽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24년 봄 정월, 크게 가물어 나무가 모두 말랐다.
25년 봄, 말갈의 추장 나갈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이 그 사자를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26년 가을 9월, 푸르고 보랏빛 나는 구름이 마치 누각 모양으로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27년 봄 정월, 내신 좌평을 두어 왕명의 출납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두 좌평을 두어 물자와 창고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 좌평을 두어 예법과 의식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 좌평을 두어 숙위 병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 좌평을 두어 형벌과 송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 좌평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달솔·은솔·덕솔·한솔·나솔· 장덕·시덕·고덕·계덕·대덕·문독·무독·좌군·진무·극우 등을 두었다. 6개 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월, 왕의 아우 우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28년 봄 정월 초하룻날, 왕이 자주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2월, 진가를 내두 좌평, 우두를 내법 좌평, 고수를 위사 좌평, 곤노를 조정 좌평, 유기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29년 봄 정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며, 종신 금고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3년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반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36년 가을 9월,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났다.
39년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45년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을 포위했다.
5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53년 봄 정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7. 사반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7대 사반왕<沙伴王  234.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붕어하자, 그의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므로 폐하고 초고왕의 동복 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소문국(조문국) - 대한민국의 고대국가




한국의 고대국가


소문국 ( 조문국 )

                 - 약 400 년간 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에 있었던 고대 국가이다.
                 - 남당유고

예왕(穢王) (? - ?) 나라를 바침

용왕(龍王) (B.C.124 - B.C.119) 재위6년

호왕(虎王) (B.C.119 - B.C.118) 재위2년

자성여주(紫聖女主) (B.C.118 - B.C.99) 재위20년

봉왕(鳳王) (B.C.99 - B.C.93) 재위7년, 자성여주의 신하

월왕(月王) (B.C.93 - B.C.83) 재위11년, 봉왕의 아들

벽왕(碧王) (B.C.83 - B.C.65) 재위19년, 월왕의 아들

자제(紫帝) (B.C.65 - B.C.14) 재위52년, 벽왕의 아들, 사방을 정벌하고 동서에 위엄을 떨쳤다.

취제(翠帝) (B.C.14 - A.D.3) 재위17년, 자제의 아들

소문(召文) (A.D.3 - A.D.10) 재위8년, 취제의 아들, 탈탈(脫脫)의 계부(繼夫)

경덕(景德) (A.D.10 - A.D.74) 재위65년, 산운(山雲, 자제의 서자)과 탈탈(脫脫, 취제의 비)의 소생,
                                       문물(文物)이 크게 일어났다.
                                       후에 신라에서 사당을 짓고 모셨다.

문무왕(文武王, 혹은 暖帝라고 칭함) (A.D.74 - A.D.93) 재위20년, 경덕의 아들

문단(文丹) (A.D.93) 재위2월, 문무왕의 아들

목단(牧丹) (A.D.93 - A.D.107) 재위15년, 문단의 동생

보문(宝文) (A.D.107 - A.D.131) 재위25년, 목단의 아들

경문(景文) (A.D.131 - A.D.160.9) 재위 30년, 보문의 아들

비패(翡貝) (A.D.160.9 - A.D.163.3) 재위 3년, 숭덕에게 국정을 위임하고, 재위3년에 폐위, 신라사초의 재위기간이 차이가 있다.

숭덕(崇德) (A.D.163.3 - A.D.169.겨울) 자립 7년, 180년 12월 사망.

                                       A.D.170.겨울 아들 윤명이 정권을 얻어 나라를 오로지 하고,
                                       숭덕은 여색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음.
                                       이 시기부터 사망할 때 까지 태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仙政을 한 시기가 12년이라고 하였다.
                                       합이 18년이라고 하였다.

윤명(允明) (A.D.180.12 - A.D.184.10) : 재위 3년, 신라사초에 재위기와 차이가 있다.

호묘(好妙) (A.D.184.10 - A.D.196.8) : 윤명의 처, 재위 13년

묘덕(妙德) (A.D.196.8 - A.D.228.1) : 윤명과 호묘의 아들, 재위 33년, 운모공주의 부친, 소문이 8국으로 나뉨

묘초(妙楚) (A.D.228.1 - A.D.245.2) : 소문이 8국으로 나뉨. 묘초가 신라에 나라를 바치려고 함.
                                     나라를 바치겠다는데 오히려 왕이 자신의 딸을 주며 보내는 이유는
                                     신라가 소문국을 관리하기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벌휴이사금 2년 2월(245년 2월)에 멸망시킨 이유는
                                     소문이 벌휴의 골품의 문제를 들어 감문, 아슬라, 사벌과 연합하여
                                     신라를 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6세 단군 달문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무진 원년(BC 2083) 
임자 35년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요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
' 아침해를 먼저 받는 동녁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임하셨네. 환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 신들이 환웅을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에 우 뚝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희대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있는 자 먼저 원한을 풀고 병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진한은 나라안을 진압하고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그릇과 같으니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을 이뤄 나란히 있고 ,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은 일어났다가 망하는 법. 흥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
고 하였다.
  
마침내 뭇 한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 대저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의 오훈 신시의 오사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일로 삼는도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니라.'
라고 하셨다.
먼 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 하였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곳이었다.
계축 36년 단제께서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BC 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다. 
계해 2년 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 4년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다.
정 축 16년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 단을 봉축하고 많은 환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사 곧 붕어하시나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4세 단군 오사구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 신 원년(BC 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이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 때 이후 신선 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무자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하여 람藍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하였다.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6. 구수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6대 구수왕<仇首王  214~234  재위기간 20년>
구수왕[혹은 귀수라고도 한다.]은 초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하였다. 초고왕이 재위 49년에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에 와서 포위했으나 성주가 굳게 수비하니 적이 퇴각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사도성 밖에서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병이 많았다.
4년 봄 2월, 사도성 옆에 두 곳의 목책을 세웠다. 동서의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5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을 포위했다.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7년 겨울 10월, 왕성 서문에 화재가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방어하였다.
8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40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한수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9년 봄 2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 명령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 서울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 신라의 우두진으로 군사를 보내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대패하고,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11년 가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이 침입하였다. 우리 군사는 봉산 아래에서 그들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4년 봄 3월,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곧 비가 내렸다.

16년 겨울 10월, 왕이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은 정예군 3백 명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18년 여름 4월, 밤알 크기의 우박이 내렸다. 이에 맞은 새들이 죽었다.
21년, 왕이 붕어하였다.

5. 초고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5대 초고왕 <肖古王  166~214  재위기간 48년 >
초고왕[소고라고도 한다.]은 개루왕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에 붕어하자, 그의 뒤를 이었다.
2년 가을 7월,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두 성을 격파하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동쪽의 여러 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신라왕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까지 진격해왔다. 왕은 신라군이 많아서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이전에 빼앗았던 성을 돌려주었다.

5년 봄 3월 그믐 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21년 겨울 10월, 구름 없이 우레가 쳤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22년 여름 5월, 서울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랐다.
2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24년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25년 가을 8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 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26년 가을 9월, 치우기별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34년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39년 가을 7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요차성을 공략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왕 나해가 분개하여 이벌찬 이음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을 치게 하였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정 성좌에 나타났다.

40년 가을 7월,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
43년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물어서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그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44년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45년 봄 2월,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고 동부의 민가를 그곳으로 옮겼다.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46년 가을 8월, 남쪽 지역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47년 여름 6월 그믐 경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48년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쳤다. 왕이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곡식 1백 석을 주었다.
49년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에 이르렀다.
왕이 붕어하였다.

4. 개루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대 개루왕 <蓋婁王 128~166  재위기간 38년>
개루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 기루왕이 재위 52년에 붕어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10년 가을 8월 경자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28년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우리 나라로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소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를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왔으나 모든 성이 굳게 방어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39년, 왕이 붕어하였다.

3세 단군 가륵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해 원년(BC 2182) 5월,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 신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듯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일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리하여 3 , 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뭉쳐서 깊고 묘한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이라 하며 구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경 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
  
신축 3년 실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주상이 되었다. 
병 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 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후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

2세 단군 부루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 축 원년(BC 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 짓고 뽕나무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제순유우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쫒아내시고, 동무와 도라들을 그곳의 제후로 그 공을 표창하였다.
  
신 시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와하였으며 신인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의 계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끊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 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임 인 2년 단제께서는 소련 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루었으니, 사흘동안을 게을리하지 않고, 석달동안 느슨하지 않았고, 한해가 지났을때까지 슬퍼 애통하였으며 삼년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달로 멈추던 것을, 오래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써 알려졌으니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수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이익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계 묘 3년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경술 10년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랄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임자 12년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 
무 술 58년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듯 산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이 새로 즉위했다.

1세 단군 왕검


1세 단군 왕검  

고기에서 말한다.
‘왕 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BC 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으로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BC 2333)년 제요도당 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무진 원년 바햐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이에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짖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맞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년(BC 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께서는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에 그 비석이 있다. 
무오 51년(BC 2283) 임금께서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짖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이 바로 그것이다.
갑 술 67년(BC 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와 영주 두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희대지방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경 자 93년(BC 2241) 단군께서 버들궁전에 계셨는데 흙계단이 저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박달나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이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에까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갔다.
이 에 천하의 따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에서 붕어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자오지한웅 - 치우천왕


자오지한웅
치우천왕

신시의 힘을 받아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하였다.
범족을 하삭에 살도록하고, 용감한 병사를 길렀다.
유망이 쇠약해지니 병사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가 될만한 인재 81인을 발탁하여 부대의 대장이
되게하고,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만들었고,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한해동안 아홉개의 제후를 점령하고,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고, 양수를 건너
공상에 이르니, 공상은 지금의 진류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해에 12제후국을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않는자가 없었다.
치우천왕은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했다.

때에 공손헌원이 일어나니 소호를 보내 탁록에서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굴복치않고 백번이나 싸워오므로 구군을 이끌고
탁록의 유웅벌판에서 참살하니 그 숫자는 셀수가없었다.
이에 탁록에 성을 쌓고 연의 회대 지방을 점령햇다.

복희와 여와


복희와 여와

태호복희씨는 태우의 한웅의 막내 아들로서,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에 옮겨 수인, 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에 살았으니,
풍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갈라져,
패, 관, 임, 기, 포, 이, 사, 팽의 여덟가지 성이되었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에 희족의 옛거처가있다.
임, 숙, 수, 구, 수유의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있다.
복희는 신용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를 갑자로 바꾸었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받았다.
주양은 옛문자에의하여 처음으로 육서를 전했다.
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있다.
신농은 열산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며, 소전은 소호와 함께 모두 고시씨의 방계이다.

배달 한웅의 후예들


배달 한웅의 제후들

한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 동쪽엔 창힐, 서쪽엔 헌후가 있었다.
대효는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으니,
모두 배달 한웅의 제후들이었다.

오가


오가

신시에는 오사가 있었으니 오가가 주관했다.
우가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고,
저가는 병을 주관하고,
양가는 선악을 주관했다.

단군


단군

한웅천왕은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치니
무리들이 잘 따랐다.
후에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어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구한은 모두 삼신을 한뿌리로 조상으로 삼고 소도와 관경을
관리하며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을 하였다.
이에 구한은 모두 삼한에 통솔되고 천제의 아들을 단군이라 불렀다.

곰족과 범족


곰족과 범족

때에 곰족과 범족이 함께 살기를 비니 쑥 한다발과 마늘 스무개로
백일기도를 하게했다.
곰족은 기한을 잘 지켜 한무리가 되었으나, 범족은 참을성이 없어
한무리가 되지 못하였다.

원주민은 범족이었으나 잔인하고 약탈을 일삼았고,
이주민인 곰족은 어리석고 자만하여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곰족의 여추장이 함께 살기를 청하니 허락하였으나,
범족은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사해로 내쫓았다.

신시


신시

한웅씨가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고 오사를 주관했다.
신시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배달이라했다.
웅씨의 여인을 아내로 삼고 짐승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이에 한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라하고 그를 한웅천왕이라했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 생명, 형벌, 병, 선악을 주관했다.

2016년 1월 10일 일요일

3. 기루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3. 기루왕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대 기루왕 <77~128  재위기간 51년>
기루왕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다루왕 재위 6년에 태자가 되었고, 50년에 왕이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9년 봄 정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여름 4월 을사에 객성이 자미 성좌로 들어갔다.

11년 가을 8월 그믐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13년 여름 6월,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주민들의 가옥이 무너졌다. 사망자가 많았다.
14년 봄 3월,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았다.
여름 6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쓰러뜨렸다.

16년 여름 6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17년 가을 8월,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한꺼번에 떨어졌다.
21년 여름 4월,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23년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박이 내렸다.

27년,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29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31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32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35년 봄 3월, 지진이 났다.
겨울 10월, 또 지진이 났다.

37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40년 여름 4월,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
6월, 열흘동안 큰 비가 내려서 한강물이 넘쳐서, 주민들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가을 7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게 하였다.

49년,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자 서신을 보내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52년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2. 다루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2. 다루왕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대 다루왕 <28~77  재위기간 49년>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붕어하자, 그 뒤를 이었다.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2월, 왕이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3년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4년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 왕이 횡악 아래에서 사냥하다가 두 마리의 사슴을 연이어 적중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6년 봄 정월, 왕의 맏아들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남쪽 주군에 명령하여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7년 봄 2월, 우보 해루가 나이 90세로 사망하였다. 동부 흘우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그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10년 겨울 10월, 우보 흘우를 좌보로 삼고, 북부 진회를 우보로 삼았다.
11월, 지진이 났는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11년 가을, 곡식이 잘 익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동서 양부를 순회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하여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일인당 곡식 두 섬을 주었다.

21년 봄 2월, 왕궁 뜰에 있는 큰 홰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었다.
3월, 좌보 흘우가 사망하자 왕이 슬프게 울었다.

28년, 봄과 여름이 가물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고 사형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29년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36년 겨울 10월, 왕이 낭자곡성까지 토지를 개척하였다.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신라는 거절하였다.
37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기병 2천 명을 동원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이들과 대적하여 물리쳤다.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백 명을 그곳에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쫓겨났다.
43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46년 여름 5월 그믐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47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48년 겨울 10월,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9년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였다.
50년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1. 온조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1. 온조왕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대 시조  온조왕   <B.C18~28  재위기간 45년>
○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소서노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 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원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저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왕이 그의 재종숙부 을음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 관계의 임무를 맡겼다.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쳤고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었다.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5년 겨울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면서 사냥하여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6년 가을 7월 그믐 신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8년 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점점 차지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만일 옛날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투로 승부를 결정내보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이는 당연히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리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었다.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이를 마한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왕이 200명의 군사를 보내 곤미천에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을 거점으로 자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직접 100명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와 구원하였다.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퇴각하였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13년 봄 2월,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15년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 봄,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구곡까지 갔다. 그러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되돌아왔다.

20년 봄 2월,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그 위를 날았다.
22년 가을 8월, 석두·고목의 2성을 쌓았다.
9월, 왕이 1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도적을 만나 단번에 물리쳤다. 이 때 잡은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4년 가을 7월, 왕이 웅천 목책을 세웠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왕을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이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허물었다.

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엄청나게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머리는 하나였으며, 몸은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우물이 엄청나게 넘친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난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26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국세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해 버린다면 순망치한이 되어,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빼앗아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을 합병하였는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28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그에게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31년 봄 정월, 국내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북부를 만들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5월, 지진이 났다.
6월, 지진이 다시 났다.

3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이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가을 8월, 동부와 서부의 2부를 더 설치하였다.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36년 가을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8월, 원산·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37년 봄 3월, 크기가 달걀 정도인 우박이 내려 새가 맞아 죽었다.
여름 4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38년 봄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까지 갔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모두 없앴다.
겨울 10월, 왕이 큰 제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2백 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방어하였다.

41년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하여 등용한 것이다.
2월,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43년 가을 8월, 왕이 5일 동안 아산 벌에서 사냥하였다.
9월, 1백여 마리의 기러기가 왕궁에 모였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므로, 장차 먼 곳에서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45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말랐다.
겨울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다.

46년 봄 2월, 왕이 붕어하였다.



한웅


한웅

한국 말기에 서자 한웅이 천부인 3가지를 가지고 무리 3천을 이끌고
홍익인간을 위해 삼위태백에 내려왔다.

때에 반고 라고하는 자가 함께 살기를 청하여 허락하니,
십간십이지의 신장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묘,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 이라했다.

개마국은 일명 웅심국이라하니 북개마대령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으로부터 2백리이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월지국은 그 북쪽 5백리에 있고
직구다국 혹은 매구여국은 옛 오난하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에 패하여
금산으로 옮겨 살았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다.

파나류의 나라


파나류의 나라

파나류산 아래 한인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이다.
파나류의 나라 라고하는데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다.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모두 12국이다.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 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다.

한인


한인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올라 도를 얻어 오래 오래 사시었으니, 다음에
혁서 한인
고시리 한인
주우양 한인
석제임 한인
구을리 한인
지위리 한인에 이르더라.
지위리 한인은 단인이라고도 한다.
모두 7세를 전하여 3천년 또는 6만년이라하나 
어는 것이 맞는지 알 수없다.

나반과 아만


나반과 아만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 라고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 혼례를 이루니 
구한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한국



한국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어는 날인가 동녀동남 800 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한인이 다스리니 이를 한국이라했다.
그를 가리켜 천제한인 또는 안파견이라했으며
일곱대를 전하였으나 그 연대는 알수가없다.

2016년 1월 9일 토요일

복본


복본

황궁씨는 천산주에 도착하여 복본의 서약을 하고
큰 아들 유인씨에게 명하여 인간 세상의 일을 밝히게 하였다.
이에 유인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유인씨가 아들 한인씨에게 천부를 전하였다.

대홍수


대홍수

마고가 마고대성을 허달성으로 옮기고,
궁희, 소희와 더불어 천수를 부어 마고성을 청소하니
그 물이 동서에 크게 넘쳐 운해주의 땅을 크게 부수고
월식주의 사람을 많이 죽게 하였다.

분거


분거

황궁씨는 백모를 묶어 마고앞에 사죄하며 복본할 것을 서약하고
천인들에게 천부를 나누어주며 사방으로 나누어 살 것을 명했다.

이에,
청궁씨는 동문을 나가 운해주로,
백소씨는 서문을 나가 월식주로,
흑소씨는 남문을 나가 성생주로,
황궁씨는 북문을 나가 천산주로 떠났다.

포도


포도

백소씨족의 지소씨가 배가 고파 포도를 따 먹고 참으로 좋다하니
포도를 따먹은 사람들이 많았다.
포도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그 독으로 인해 이가 생겼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었기 때문이다.
포도를 먹은 사람들은 피와 살이 탁해져 천성을 잃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지소씨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무리를 이끌고 마고성을 떠났다.

마고성


마고성

마고대성은 실달성위에 허달성과 나란히 있었다.
마고가 실달성을 천수에 떨어뜨리니 땅과 바다가 생겼다.

마고가 명하여 천인들은 겨드랑이를 열어 각각 삼남삼녀를 낳으니
인간의 시조가 되어 곧 삼천이 되었다.

모두 마고성안의 지유를 마시므로 
오금이 있어 천음을 듣고 혈기가 맑아 수명은 한이 없었다.

2016년 1월 8일 금요일

부도


부도

부도는 신이 정한 땅이다.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마고는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
궁희는 황궁과 청궁을 낳고,
소희는 백소와 흑소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