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제나라 14. 중국 역사서도 왕으로 기록


14. 중국 역사책도 ‘왕’으로 기록


이납은 황제의 제안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 이정기의 지위를 잇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그였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당이 먼저 이납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납은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당 조정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당서는 이에 대해 ‘이납이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시각인 듯하다.
앞뒤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두 세력 간에 타협이 이뤄진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784년 황제는 이납에게 검교공부상서·운주 자사·평로절도사·치청관찰사·검교우복사·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의 관직과 함께
‘왕권’을 의미하는 ‘철권’을 전하고 ‘농서군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철권이란 살인에 대한 면책권을 뜻하는 말로, 직할 영토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일체의 사법권을 이납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당과 제의 관계가 군사적 목적으로 얽힌 협력관계였다는 사실을 뜻한다.
다시 말해 두 나라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일종의 ‘독립국 연합’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제나라의 주력부대는 한민족의 피를 지닌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중국 역사책 당서도 이를 인정 “(제가 산동을 점령했던 55년 간) 언어와 풍속에 심한 변화가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통치를 하다 보니, 백성들의 풍습이 포악해지고 인심이 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쓴 주관적 기술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우리에게
  제나라에서 고구려의 언어가 쓰였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민족의 풍습이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제나라 임금’ 이납은 34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때는 792년. 사망원인은 그의 아버지 이정기와 같은 악성 종양이었다.
당 조정은 3일 간 정사를 폐지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까닭은 이납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왕으로서 이납의 권위는 확고했던 것 같다.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도 이납의 죽음을 ‘졸’이라 하지 않고 임금의 죽음을 일컫는 ‘훙’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도 마찬가지로 이납의 죽음을 ‘훙’이라 적으며 그의 죽음에 예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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