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7일 일요일

제나라 9. 당나라와 전투


9. 당나라와 전투… 낙양 보급로 끊어


이정기의 계획은 치밀했다. 초반 전투에 밀릴 경우를 대비, 제음에서 140km가량 떨어진 서주에 2차 병력을 집결시켰다.
서주는 양자강과 회하(황하)의 물길을 타고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회(양자강과 회하)의 물품 보급로가 끊기면 정부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조정은 ‘물길’을 지키기 위해 강변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에 군사를 배치하고 1000척이 넘는 배를 정박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급한 황제 덕종은 방추병을 동원해 보급로를 지키도록 했다.
방추병은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족)의 침입에 대비하던 일종의 비상근 부대였다.
이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북쪽의 국경 수비라인이 뚫린다는 의미였다.
이정기를 막는 것이 그만큼 위급했던 것이다.

당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이정기 연합군은 한동안 강회를 얻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방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 그리고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가 병력을 이끌고 가세한 것이었다.

승자는 이정기였다. 물길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를 장악, 낙양으로 가는 수송로를 끊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천하통일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운명의 신도 용장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이정기가 악성 종양에 걸린 것이었다.

낙양 함락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측근들은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써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뽑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이정기는 781년 8월, 통한의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정기의 죽음을 알게 된 조정은 즉각 회유에 나섰다.
황제는 죽은 이정기를 태위로 추증하고, 관련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며 동맹군을 달랬다.
리더를 잃은 동맹군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중원의 피비린내가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억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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