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제나라 13. 당 나라와 정면 승부


13. 국가 건설해 당 황제와 정면승부


이제 이납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사항전을 결심한 그는 후방 운주로 진지를 옮기고 군사력을 보강했다.
운주는 이납의 아버지 이정기가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주둔했던 전략적 요지였다.

이납은 세력 보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결과가 전열과 이희열·주도·왕무준 등과 연합해 결성한 제2차 동맹군이었다.
대 제국 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군사력과 함께 거기에 걸맞은 형식을 갖춰야 했다.
제2차 동맹군은 독립국가를 수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때는 782년 11월이었다.
이납은 운주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 국호를 ‘제’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동맹군은 ‘새 나라가 생겼으며, 이납이 그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하늘에 알리는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이납은 스스로를 칭할 때 ‘과인’이라 말했다.
제나라는 각 지방행정 단위를 주로 나누고, 각 주의 행정책임자로 자사를 뒀다.
문무관료인 백관을 임명해 나라의 틀을 잡았고, 운주를 수도로 정했다.
수도의 이름은 ‘동쪽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동평부’로 바꿨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운주는 오늘날의 ‘동평’. 지금의 지명은 당시 제의 수도였던 동평부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정비가 끝나자 이납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새 나라’의 군대는 강했다. 파죽지세로 치달은 이납의 군사는 운하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던 변주를 장악했고,
이어 서주의 서쪽에 위치한 송주를 함락시켜 당나라 조정을 압박했다.
다급해진 황제 덕종은 서쪽 토번(티베트)을 지키던 군사력을 동쪽으로 돌리고, 남방의 수비를 담당하던 영남의 부대를 끌어올렸다.
시급한 것은 서쪽과 남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동쪽 제나라의 침공을 막는 일이었다.

제나라의 위세가 천하를 흔들자 이번에는 당 조정에서 이탈자들이 나왔다.
‘우승 대신’으로 있던 고관이 이납에게 군량미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조정이 흔들리자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맹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황제 덕종은 살아남기 위해, 783년 10월 봉천으로 도망을 가 버린다.

이번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은 황제측이었다.
그해 12월 덕종 황제는 봉천에서 사자를 보내 동맹군측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이 때 황제측에서 내건 조건은
  반란을 없었던 일로 치고
  관련자 모두를 사면하며
  이납·전열·왕무준·이희열 4인을 국가의 공신인 ‘훈구’로 대우하겠다는 것이었다(태평어람 권113).
‘성신문무’라 불리는 대타협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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