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7일 일요일

제나라 8. 최강 절도사


8. 15개 주 다스리던 ‘최강 절도사’


5년 뒤인 781년 정월, 이정기와 고락을 함께 했던 성덕 절도사 이보신이 숨을 거뒀다.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은 절도사 지위를 세습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 덕종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유악을 지지하던 이정기·양숭의·전열 등 당대의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 ‘4인방’은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당 조정을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결심한 것이다.

당시 이정기가 다스리던 영역은 도합 15개 주. 이는 오늘날 한반도 크기에 버금가는 넓이였다.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법령을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중앙의 권력은 너무도 취약해 있었고 황제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정기는 달랐다. 발해의 법체계를 응용해 법률을 정비하고 독립된 조세제도를 만들어 엄정하고 일관되게 적용했다.
독립된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역사책 구당서는 이 때의 이정기와 이보신을 ‘두 황제’라 표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최강의 절도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그들을 당시 사회가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쿠데타를 결심한 이정기는 청주에서 운주로 거처를 옮겼다.
운주는 산동과 낙양을 잇는 길목. 이정기의 첫 번째 공략 목표는 제국의 ‘동쪽 수도’ 낙양이었던 것이다.

이정기는 청주의 관리를 아들 이납에게 맡기고 낙양 공략에 몰두했다. 이정기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자신이 전사할 경우에 대비, 이납에게 ‘치청절도유후’라는 직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영토를 세습한다는 의미로 황제가 아니면 행할 수 없었던 파격적 조치였다.

조정은 긴장했다. 가장 강력한 절도사의 병력이 낙양의 코앞, 운주에 진을 친 것이었다.
이정기는 주야로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쟁을 준비했다. 조정도 방위에 착수했다.
낙양과 운주 중간에 위치한 변주(오늘날의 개봉)에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이 성을 축조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정기는, 경계지역인 제음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당시 장안을 수비하던 황제 직할대의 병력은 5만.
이정기가 동원한 10만 병력은 당시로선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엄청난 수의 군사였다.

당나라는 십일세란 세금을 새로 거둬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천하에 동원령을 내려 9만2000명의 병력을 제음 부근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때는 781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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