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7일 일요일

제나라 11. 낙양 보급로 끊다


11. 낙양 물자 보급로 끊어 국고 고갈

작전의 기본 틀은 이정기와 같았다.
낙양으로 향하는 수로를 차단, 물자의 보급을 끊어 조정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병력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납과 전열은 군사를 이끌고 강회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물길의 요지 와구로 진격했다.
양숭의는 이유악과 함께 섬서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한수의 요충지, 양과 등으로 쳐들어갔다.
와구는 이정기가 낙양 공략을 시도했을 때 정부군이 군사를 배치했던 물길의 길목이었다.

엉성한 정부군은 전열을 정비한 쿠데타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와구와 양·등은 순식간에 점령됐다.
조정은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남쪽에서 생산된 물자는 당의 수도로 공급되지 못했고, 장안과 낙양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장안은 물자의 자체조달이 불가능한 도시였다. 수도의 백성들은 물품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조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황제는 망연자실해 했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동맹군의 세력을 꺾을 방도가 없었다.
“대책이 없겠는가?” 황제는 백관을 소집해 방책을 구했다.
제국의 수도가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묘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대신들의 눈이 일제히 쏠렸다.
그는 자신의 꾀를 차근차근히 설명해 갔다. 이간질이었다.

서주자사 이유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납의 아저씨인 그는 이정기의 영향력으로 서주의 통치를 맡게 된 사람.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황제의 사신이 은밀하게 접근했다.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황제의 유혹은 달콤했다.
이유는 조정에 ‘서해기관찰사’와 ‘해주이기자사’란 벼슬을 요구했다.
덕종이 그의 요구를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사신이 황제의 뜻을 전하자, 이유는 서주를 들어 당에 투항했다.

서주는 이납 영토의 남쪽 방어선이었다. 남방 마지노선이 뚫린 것이었다.
이납은 당황했다. 당은 양자강과 회하의 수로를 회복, 군수품 보급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불운은 계속됐다. 북방전선의 요지 복양을 지키던 전열이 정부군에게 쫓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납은 대장 위준에게 병사 1만을 주어 전열을 구하도록 했다.
하지만 위준은 하동 인근에서 절도사 마수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복양이 함락된 것이었다.

전세는 역전됐다. 이납은 남쪽과 북쪽의 방어선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배반이 이어졌다.
덕주를 지키던 이사진과 체주를 지키던 이장경도 조정에 항복을 한 것이었다. 당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이납의 기세를 꺾기 위해, 투항한 이사진에게 어사중승이란 벼슬을 내리고 덕주 자사로 임명했다.
또 이장경에게는 간교비서감이란 벼슬과 함께 체주 자사의 지위를 부여했다. 동맹군은 크게 흔들렸다.

이납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고구려의 피를 나눈 장군들이 배반을 했다는 사실에 그는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이납은 즉시 군사를 모았다.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서주 공략에 나섰다.
황제도 방비에 착수했다. 서주 인근의 전 군에 동원령을 내린 것이었다.
때는 781년 11월. 양측은 서주의 행정요지 팽성(오늘날의 동산지역)에서 맞붙었다.
팽성의 산세는 몹시 험했다.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갖춘 뒤 공략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납은 성급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결과는 이납의 패배였다.
팽성전투에 참가했던 이납의 군사 1만명은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상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납의 군대가 패하자 회남 절도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해주 자사 왕보가 당에 투항했고,
밀주 자사 마만용도 그 다음달인 12월 항복을 선언했다.

이납의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하지만 이납은 역시 맹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패인을 면밀히 분석했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 전열을 가다듬은 이납은 이듬해인 782년 1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조정에 빼앗겼던 해주와 밀주의 2개 주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해주와 밀주를 빼앗긴 당나라 장군 진소유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이납의 군사가 자신을 쫓는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을 결심한다. 그는 참모 온열을 이납에게 보냈다.

“호주·수주·서주·노주 등의 여러 주에서는 이미 싸움이 끝났습니다.
황제군은 무장을 해제한 채 폐하의 칙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소유는 충성을 다짐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당시의 기록은 이때 진소유가 ‘폐하’라는 표현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정기와 이보신을 ‘두 황제’라 칭했던 중국 역사책 구당서의 기록과 연계시켜 볼 수 있다.
당시 사회가 이정기 부자를 임금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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