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5일 금요일

제나라 3. 고구려 유민의 왕국 이정기의 제나라


3.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터 닦은 이정기


뛰어난 무공으로 절도사 자리 장악해 15개주 통치

  ‘고구려인’ 이정기는 73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회옥. 영주는 당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였던 ‘평로’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조양시다.

이정기는 무술에 능했다. 그의 무공에 대해 중국 역사책 ‘구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투르크계 위구르족인) 회흘 병사가 제멋대로 행동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러자 이정기가 가장 센 회흘 병사에게 결투를 청했다. 사람들은 모두 ‘회흘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정기가 회흘의 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회흘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 사건으로 이정기는 군인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때는 758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리더십을 발휘하던 그에게 한 가지 사건이 터졌다.
‘평로’의 절도사로 있던 왕현지가 사망한 것이었다.

절도사가 죽자 관료들은 후계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여론은 왕현지의 아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이정기의 야심은 그렇지 않았다. ‘유력 후보’만 제거하면 되는 일이었다. 26세의 이정기는 칼을 뽑았다.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었다.

이정기는 같은 고구려인이자 자신의 고종사촌인 후희일을 내세웠다. 조정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병사들의 ‘영웅’ 이정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로는 수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던 ‘한민족의 땅’이었다.

안사의 난(755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황제 숙종은 타협을 택했다.
762년 후희일을 평로 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군인에 의해 절도사가 옹립된 당나라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평로를 얻은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위덕 절도사 이보신과 하북에서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찬스가 왔다. 산동반도의 청주에서 무장 사조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정은 평로 절도사에게 진압을 명했다. 선봉은 이정기였다.

이정기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주와 범양에서 사조의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패한 반군은 청주로 몰렸다. 청주는 현재의 익도로, 반군의 본거지였다.
이정기는 사조의를 끝까지 추격, 청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로로 이정기와 후희일은 평로·치청·기주·제주·밀주·해주 일대를 관할하게 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